2020년 3월 2일 월요일


     신종 코로나가 이미 4212명으로 늘어나고 사망자도 발생했어요. 뉴스를 보면서 두려운 느낌이 들기 시작해요. 이틀 전만 해도 아직 먼 얘기 같았는데 이제는 정말 가깝게 느껴지네요. 누군가의 몸에 바이러스가 있는지 알 수도 없고, 공기를 통해서도 전염된다니 최대한 예방에 신경써야겠어요. 하지만 통제는...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있고 재난 역시 하나님의 손에 있어요. 하나님이 이번 재난을 통해 우리 인류에게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라고 하는 것이라 느껴지네요. 성경에 기록하기를 소돔성와 니느웨성 사람들은 똑같이 타락하고 사악했지만 소돔성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여 결국 하나님께 멸망했지만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메세지를 듣고 온 성 사람들이 전부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하나님께 회개하여 결국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용서를 받았어요. 성경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감히 묻건대 어느 누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구원을 반드시 받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당연히 구원할 능력이 있어요. 하지만 자신의 행함을 스스로 생각해봐요.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지...대부분의 경우 일과 하나님을 섬김이 서로 충돌할 때 저는 늘 일을 택했고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그 사람이 받아들이면 입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했지만 속으로는 나의 능력이라고 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했지요. ...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회개하여야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을까요?

2020년 3월 1일 일요일

매일 성경 큐티 : 마태복음 7장 21~23절

     이른 아침, 창가에 앉아 묵상의 시간을 가지며 말씀을 보았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1~23)
하나님의 약속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자신을 비춰 보았다. 나는 뜨겁게 믿음 생활하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복음 전파에 힘을 쓰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며, 나약한 형제자매들을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그렇게 일한 대가는 당연히 하나님께 인정받고 천국에 가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보면서 궁금증이 생겼다. 주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왜 수고하며 열심히 헌신한 사람들을 도리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정죄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다.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이 악행인지 선행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바로 네가 생각하는 것, 네게서 드러나는 것, 네가 행한 것이 진리를 행했다는 증거가 되는지, 실제적으로 진리를 살아 내는 증거가 있는지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너에게서 이런 실제를 찾아 볼 수 없고, 이런 삶을 찾아볼 수 없다면 너는 틀림없이 악행을 하는 사람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볼까?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 겉으로 보여지는 너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며, 사탄을 부끄럽게 하거나 사탄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수치가 되는 표징이 되는 것으로 본다. 또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 헌신 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을 위해 너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 본다. ‘스스로를 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사탄을 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악행을 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할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네가 행한 것은 선행이 아니라 악행이기 때문에 상이 없으며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지 않겠느냐?

     이 말씀을 보면서 나의 궁금증이 모두 해소되었다. 선행과 악행을 구분하는 하나님의 기준은 사람의 기준과 완전히 달랐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기준은 겉면의 행위에 따르지 않고, 얼마나 많은 것을 버리고 헌신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 기준은 우리가 사역을 할 때 가지는 마음과 실행을 통해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이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사탄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정직한 마음과 하나님을 흡족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사역을 한다면, 그것은 사탄 앞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자 하나님께 인정받는 선행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국에 가서 복을 받고 영생을 얻겠다는 마음으로 사역을 한다면, 많은 것을 지불했을 때, 그것을 밑천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기게 된다. 나아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우러러 보게 만든다. 이는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역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악행으로 보여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일을 한다면,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며 많은 권능을 행할지라도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으며 도리어 불법을 행하는 자, 악행을 한 사람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 유대교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율법을 전하며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만 놓고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누구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저주를 받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직위와 밥줄을 위해 열심히 사역했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좋은 행위였지만 그것은 위선적인 것이었고, 그 목적은 사람들의 추앙심을 사고, 사람들을 자기 앞으로 모으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셔서 사역하실 때, 주님이 나타내시는 많은 기적을 보고, 주의 권병 있는 말씀을 듣고, 능력의 사역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그들은 신도들을 이끌고 주의 말씀과 사역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들은 주의 말씀을 참람한 말이라 정죄하고, 주의 능력을 귀신의 왕을 힘 입은 것이라 했으며, 갖은 헛소문으로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미혹했다. 그 결과 신도들은 그들의 말을 따랐고, 그들은 자기 지위와 밥줄을 지키게 됐다. 그리고 로마 정부와 결탁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리새인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 사례다. 이로써, 자기 목적을 이루려는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아무리 많은 고난을 받으며 큰 사역을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불법을 행하는 사람, 곧 악행을 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내가 많은 것을 버리며 헌신하고, 열심히 사역했던 것이 과연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내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 돌아보았다. 말은 심방을 다니며 형제자매들을 붙들어 주고 도와준다고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내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교를 해야 할 때면,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한다는 말을 들을지, 어떻게 하면 나의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그래서 형제자매들의 옹호를 받을 때면, 사역을 해도 힘이 생겼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면 힘이 빠졌다. 즉, 내 설교를 잘 듣지 않거나 반응이 별로 좋지 않고, 나를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면 열심히 사역해야겠다는 마음이 작아졌다. 이런 나의 모습들을 돌아보니, 맨날 ‘주여 주여!’를 외치며 주의 일을 한다고 했지만 속마음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계속 이대로 나아간다면 나 역시 하나님 앞에서 불법을 행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긴박감을 느꼈다. 나는 얼른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인정하시는지 살펴보았다.

     주님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태복음 22:37~38)라고 하셨다. 주의 말씀에 따라 비춰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 즉 범사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많은 고난을 받고 많은 사역을 했을지라도 자기 자신을 위한 야망이나 욕심이 없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오직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바라는 것 없이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어떤 시험이나 시련이 닥쳐와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순종하고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진정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떠올랐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았고 하나님과 따지지도 않았으며, 순수하게 말씀을 청종하였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려드리려고 했다. 그리고 욥도 생각났다. 욥은 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굳게 지켰다. 그랬기 때문에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는 시련 속에서도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여전히 여호와의 이름을 칭송하였다. 그렇게 그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 베드로도 있었다. 그는 평생 주님을 따르며 진리를 사모했다. 주님의 부탁을 받은 후, 주님의 뜻과 요구에 따라 교회를 목양했으며, 마지막에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렸다. 그렇게 죽기까지 순종하며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진정 천국에 갈 수 있고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인도에 감사드린다! 오늘 아침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라는 주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도 이제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즉, 범사에 나 자신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앞으로 범사에서 나의 마음 가짐을 살펴보고, 내가 진정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성찰해야겠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며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2020년 2월 29일 토요일

오늘의 수확-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아주 중요해요

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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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단지에도 첫 확진자가 나와 지금 동선을 체크하고 있어요.선배에게 이 얘길 했더니 그가 말했어요. 두렵고 무서워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관건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을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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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현재 인류가 사는 모습을 보면, 사람은 아직도 진정한 인생을 찾지 못했고, 여전히 세상의 불공평함, 쓸쓸함, 처참함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면 수많은 사람이 계속 대자연을 끌어안고 ‘인생’의 맛을 자세히 음미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 세상의 실정이 아니란 말이냐? 이것이 내가 사람에게 발하는 구원의 음성이 아니란 말이냐?』,
하나님이 사람을 끊임없이 일깨우고 격려하는 것은 그가 전례 없는 재난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나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사람의 육과 영혼이 감내하기 어려운 재난으로, 사람의 육뿐 아니라 영혼까지 징벌을 받게 된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의 보살핌 속에서 살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영을 깨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세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두 와서 하나님의 음성을 찾고 하나님의 발자국을 찾길 원해요. 사실, 이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사랑이었어요.

2020년 2월 18일 화요일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27)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났을 때, 처음 가졌던 생각은 바로 살아 있는 사람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살아 숨 쉬는 사람, 그와 함께 생활하고, 그의 반려가 되고, 그의 곁에서 함께하는 사람 말이다. 이 살아 있는 사람은 그의 말과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으며, 그와 대화할 수도 있는 존재여야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처음으로 친히 흙을 취해 마음속으로 그리던 첫 번째 살아 있는 사람을 만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살아 있는 존재에게 아담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렇게 살아 숨 쉬는 사람을 얻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느냐? 그는 처음으로 가족과 반려가 생긴 즐거움을 느꼈으며,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을 느꼈고, 마음에 애틋함을 갖게 되었다. 이 살아 숨 쉬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은 처음으로 위안을 느꼈다. 이는 하나님이 처음으로 생각이나 말씀이 아닌, 손으로 친히 행한 일이었다. 이 생명체, 이 살아 숨 쉬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이렇게 뼈와 살이 있고 형태를 갖추고 있고 게다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처음으로 경험해 본 적 없는 기쁨을 느꼈고, 진정으로 자신의 책임감을 느꼈다. 그는 이 생명체에 애틋함을 갖게 됐고, 아울러 이 살아 있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감화되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또한, 이 생명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처음으로 이런 사람을 더 많이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첫 번째 생각이 들면서부터 생긴 일련의 일들로서, 하나님에게는 다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으로 행한 이런 일들로 인해 기쁨을 느꼈든, 책임감을 느꼈든, 아니면 사람에 대한 애틋함을 느꼈든 간에, 그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존재가 없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처음으로 전에 없던 외로움과 슬픔을 진정으로 느꼈다. 사람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애틋함과 마음을 사람이 받아 주지도, 이해해 주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슬프고 고통스러웠다. 그가 사람을 위해 일련의 일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즐거움 뒤에, 사람이 그에게 가져다준 기쁨과 위안은 어느새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슬픔과 외로움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당시에 가졌던 하나님의 심정과 생각이었다. 이 일련의 일들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마음은 기쁨에서 슬픔으로, 슬픔에서 아픔으로 변했으며, 동시에 초조함까지 깃들었다. 그는 발걸음을 다그쳐 이런 사람, 이런 인간을, 더 이상 그의 말씀에 대답 없이 듣고만 있는 사람, 그가 일할 때 어떻게 그와 협력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 그의 요구 앞에서도 무관심한 사람이 아닌, 그의 마음과 뜻을 가능한 빨리 이해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 그와 한마음 한뜻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나님이 처음 행한 일련의 일들은 하나님의 경륜과 지금의 인류에게 있어 아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었다.』  "

2020년 2월 17일 월요일

비밀을 밝히다: 성육신이란?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13:16) 이처럼 성육신은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비밀을 알려 주지 않으신다면,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과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해 그분을 평범한 인간으로 치부해 십자가에 못 박는 대죄를 지었습니다. 지금은 말세의 마지막 때이자 주의 재림을 맞이할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때 주께서 성육신하신 인자로 나타나 사역하신다면, 우리는 과연 주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성육신에 관한 진리를 모른다면, 우리는 과거 바리새인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성육신에 관한 진리는 우리가 주의 재림을 맞이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 성육신이란 과연 무엇을 말할까요? 아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성육신이란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것을 일컫는다. 즉, 하나님이 육신의 형상으로 자신이 만든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이라고 한 이상, 무엇보다 먼저 육신, 특히 정상 인성을 갖춘 육신이 필요하다. 이것은 최소한으로 갖춰야 할 조건이다. 사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함의는 육신으로 사역하고 육신으로 생활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본질이 육신이 되고 사람이 된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며, 이 육신은 육에 속한 그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육에 속하지 않은,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모두 갖고 있으며, 그의 신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의 정상 인성은 육신으로 하는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신성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

     말씀을 통해, 성육신은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입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이 정상 인성과 정상적 사유를 가진 육신에 실체화되신 것입니다. 그 육신은 외적으로는 매우 평범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낼 수 있고 인류를 이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완전한 신성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완전한 신성이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지니신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본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하심,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 나아가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을 모두 그 육신에 그대로 실체화했음을 의미합니다. 그 육신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해, 땅에서 인류 구원 사역을 하고 계시는 실제의 하나님이십니다. 겉보기에 그리스도는 평범하고 범상한 인자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피조된 인간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피조된 인간은 인성만 있을 뿐, 하나님의 신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정상 인성은 물론, 완전한 신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의 본질을 지녔기에 하나님을 대표합니다. 하나님의 신분으로 모든 진리를 선포하시고 하나님 성품의 소유와 어떠하심을 선포하시며, 인류에게 진리, 길 생명을 주십니다. 이는 그 어떤 피조물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시다"라는 사실이 이 평범한 육신입니다. 그가 바로 성육신하신 실제의 하나님이십니다.

2020년 2월 16일 일요일



     언제부턴가 우리 교회도 헌금 봉투를 반투명 봉투로 바꿨어요. 저는 오늘 서둘러 집을 나오느라 준비해 둔 돈을 가져오는 것을 깜빡했고, 교회에 가서 주머니에 남은 잔돈을 봉투에 넣었어요. 헌금 봉투를 관리하는 집사님이 제 봉투를 보더니 제게 눈을 흘기면서 서둘러 돈봉투를 챙겨 갔어요, 끝나고 밖에서 만났을 때, 저는 그 집사님에게 인사를 했어요. 평소 같으면 제게 몇 마디라도 했을 텐데 오늘은 아는 체도 하지 않았어요. 저는 정말 잘 이해가 안 가요. 헌금을 많이 하면 사람을 높이 보고, 헌금을 적게 하면 정말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요? 이건 세상과 다를 바가 없잖아요? 예수님은 헌금의 많고 적음을 보시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이런 일이 생기게 되어 저는 정말 속상하네요(́·_·`)

2020년 2월 15일 토요일

주기도문에 감춰진 비밀: 하나님나라는 정말 하늘에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천국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기도문에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10)라고 기록되었으며, 계시록에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계시록 11:15)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천국은 하늘에 있을까요? 아니면 땅에 있을까요? 본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는가, 땅에 있는가

   ‘’예배 때마다 목사님은 늘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2~3),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계시록 21:10, 21) 이와 같은 성경 구절을 언급하며 주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으니 주께서 다시 오실 때면 우리는 모두 들림 받아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진주와 홍마노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이니 그때 가서 버림받지 않도록 힘써 기도하며 깨어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저는 천국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했습니다. 아직까지 귀한 진주나 마노를 본 적이 없어서 천국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가끔은 제가 천국에 가 있는 상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전부 금빛으로 휘황찬란하게 반짝이고 길을 걸으면 신발이 황금으로 된 바닥에 부딪혀 맑은 소리가 날 것 같았습니다. 그 어떠한 먼지의 기운도 없었는데 바로 제가 생각하는 하늘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천국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주님이 하루빨리 돌아오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기를 소망했고, 이 또한 저의 기도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주기도문을 묵상하다가 ‘나라이 임하옵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10)라는 부분에서 갑자기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가 땅에서 이뤄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셨고 목사님은 주님이 오시면 우리를 하늘 천국에 데려간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말이 주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아서 저는 조금 의아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열리다

     하루는 한 사역자를 따라 어느 소그룹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 자매님이 성경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교제를 했고 그 내용 또한 참신했습니다. 저는 흔치 않은 기회라는 생각에 자매님에게 물어 보기로 마음을 먹고 바로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늘 깨어 기다리면 주님 오실 때 하늘로 들림 받는다고 하셨는데, 주기도문에 보면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오시면 하늘로 들림 받게 될 거라는 목사님의 설교와 모순이 됩니다. 그럼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는 건가요? 아니면 땅에 있는 건가요?”

     저의 질문에 자매님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형제님, 참 좋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우리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주기도문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나라를 하늘에 지으시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주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3: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하나님 말고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하기를 구하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계속 하늘에 올라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 몇 구절을 더 찾아볼까요.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하니’(계시록 11:15),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시록 21:2~4) 이 구절에 보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다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일 우리의 상상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 있고, 주님이 돌아오셔서 우리를 데려고 하늘에서 생활하신다면, 이러한 예언은 다 허언이 되지 않겠어요? 모두 아시다시피, 태초에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을 지으셨고, 에덴동산에서 생활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지상에서 땅의 만물을 관리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화롭게 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이 땅에서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후에도, 하나님은 이 땅에서 구원의 사역을 펼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것도 땅에서 하신 일이며, 예수님이 친히 말씀이 육신되어 인간의 속죄제가 된 것도 땅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종착지는 하늘이 아니라 지상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것입니다.”

     자매님의 말은 매우 현실적이었습니다. 성경과도 잘 맞았으며 주님의 말씀에도 부합했습니다. 전에 목사님이 한 말은 예수님의 말씀과 모순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저는 그 속의 진리를 알지 못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니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도 땅에서 일하셨고, 인류에 대한 구원 사역도 계속 땅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하기를 간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자매님은 저에게 말씀 한 단락을 읽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돌아갈 곳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이 가야 할 곳이 있다. 하나님은 안식하면서도 전 인류가 땅에서 살아가도록 계속 인도하고, 사람은 하나님의 빛 속에서 하늘의 유일한 참하나님을 경배한다. 하나님은 사람 가운데서 살지 않고, 사람 역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거처에서 살지 못한다….사람이 안식에 들어간다 함은 사람이 진정한 피조물이 되어 땅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뿐만 아니라 인류가 정상적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더 이상 거역하지도 대적하지도 않고, 처음에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삶으로 회복함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안식에 들어간 후 각자가 누리는 삶과 종착지이다. 사탄을 물리치는 것은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추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경영 사역을 끝낸 뒤에 안식에 들어가고 사람이 철저히 구원받아 안식에 들어가는 것 또한 필연적인 추세가 되었다. 사람이 안식하는 곳은 땅이고 하나님이 안식하는 곳은 하늘이다. 사람은 안식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땅에서 살아가고, 하나님은 살아남은 인류를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인도하면서 안식한다.

     자매님은 교제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방금 읽은 내용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탄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구원한 다음, 이 땅에서 인류를 계속 이끌어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절대 우리를 끌어올려 하늘에 두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살고 있겠지만 그때가 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이 모두 멸망되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땅에는 더 이상 사탄의 방해와 괴롭힘이 없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기 질투, 기만이 사라지고, 수고하는 일도, 염려하는 일도, 생로병사 하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처음의 아담과 하와처럼 에덴동산에 살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과 인간은 진정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인류를 이끄시며 하늘의 풍성함을 내려 주시고, 인류는 땅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하늘에 있는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아름다운 종착지입니다. 이로써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시록 21:4)라는 계시록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매님이 읽어 준 말씀과 교제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계시록의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따라서 마음도 밝아졌습니다. 그제야 저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예비하신 아름다운 종착지는 지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삶은 사탄의 방해가 없는, 모두가 화목하게 지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인간의 종착지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며, 늘 하늘의 삶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했습니다. 지금 돌아 보면, 저의 그런 생각은 참으로 터무니없었습니다. 우리같이 이런 평범한 육체를 가진 몸이 어찌 하늘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께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우리는 아쉽지만 모임을 마쳤습니다. 교제하는 내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너무도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음 모임에 더 많은 진리를 깨닫기를 기대하며,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2020년 2월 14일 금요일

신앙이 있는 사람들의 생사윤회


     방금 우리는 첫 번째 부류인 이방인의 생사윤회를 이야기했다. 이제 두 번째 부류인 신앙이 있는 사람들의 생사윤회를 이야기해 보자. ‘신앙이 있는 사람들의 생사윤회’라는 주제도 아주 중요하고, 너희가 꼭 알아야 할 내용이다. 먼저 신앙이 있는 사람들의 ‘신앙’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말해 보자. 유대교,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불교 등 5대 종교가 있다. 이방인을 제외하고 이 5대 종교를 믿는 사람이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높다. 이 5대 종교에 성직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일반 신도는 많다. 이 각 종교의 신도들은 죽은 다음에 다른 곳으로 간다. 여기서 말한 ‘다른’은 누구와 다르다는 말이냐?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이방인, 즉 아무 신앙도 없는 사람과 다른 것이다. 그들은 죽은 후 다른 곳으로, 이방인이 죽은 후 갈 곳과 다른 곳으로 간다. 순서는 똑같다. 영계는 그들이 생전에 한 행위에 따라 그들을 판단하고 각각 달리 처리한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을 다른 곳에 두고 처리하느냐?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예를 들어 설명해 주겠다. 내가 말해 주기 전에 너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마도 그들이 하나님을 조금이나마 믿기 때문이겠지! 적어도 완전한 불신자는 아니잖아.’ 그런 이유가 아니다. 여기에는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불교를 예로 들어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겠다. 한 불교도가 있다. 일단 그는 불문에 귀의한 자로, 자신의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불교도가 삭발하고 승려나 비구니가 되면 그것은 속세를 떠나고 인간 세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났음을 뜻한다. 그는 매일 독경ㆍ염불하며, 채식을 하고, 등잔불과 함께 하는 청빈한 생활을 하며 그렇게 자신의 일생을 살아간다. 그의 육의 생명이 끝날 때 그는 자신의 일생을 정리해 볼 것이다. 하지만 죽은 후 어디로 갈지, 누구를 만날지, 어떤 결말을 맞을지는 모른다. 그는 그냥 맹목적으로 한 가지 신앙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고, 또 맹목적인 소망과 이상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난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 그의 육의 생명은 그렇게 끝난 것이고, 육의 생명이 끝나면 영계의 원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 사람이 환생하여 계속 수행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그 사람의 생전 행위와 수행에 달렸다. 평생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머지않아 곧 인간 세상으로 보내져 두 번째로 윤회하고, 다시 승려나 비구니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육의 생명은 첫 생과 같은 법칙에 따라 수행을 하고, 육의 생명이 끝나 영계로 돌아가면 영계의 검증을 받는다. 검증 후 문제가 없으면 계속해서 인간 세상으로 돌아와 다시 불문에 입문해 수행을 계속한다. 이렇게 세 번에서 일곱 번의 윤회가 끝나고 다시 영계로, 그러니까 육의 생명이 끝날 때마다 갔던 그곳으로 돌아갈 때, 그의 여러 조건과 인간 세상에서의 행위가 영계의 계율에 부합하면 그때부터는 영계에 남는다. 더는 환생하여 인간이 되지도 않고, 인간 세상에 돌아가 나쁜 짓을 하고 벌받을 위험에 노출되지도 않는다. 다시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영계에 남아 그의 상황에 따라 직무를 하나 맡게 된다. 직무를 맡는 것이 바로 불교 쪽 사람들이 말하는 ‘열반에 든다’는 것이다. 열반에 든다는 것은 주로 영계에서 일꾼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더는 환생하지 않고, 더는 벌받을 일이 없으며, 환생하여 인간으로 살면서 생기는 번뇌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 그들이 또 환생하여 동물이 될 가능성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는 그가 더 이상 윤회하지 않고 영계에 남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에 관한 하나의 예이다. 그럼 열반에 들지 못한 사람은 어떻겠느냐? 열반에 들지 못한 사람은 영계에 돌아간 후 영계 일꾼의 검증과 확인을 거친다. 그 사람이 인간 세상에 있을 때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불교에서 규정한 대로 성실히 독경ㆍ염불하지 않고 오히려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면, 영계에서는 그의 악행에 따라 판결을 내릴 것이고, 그는 분명 벌을 받게 된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그럼 이런 사람은 언제 열반에 들 수 있겠느냐? 어느 생에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봐야 한다. 영계에 돌아가 그 사람이 생전에 나쁜 짓을 한 사실이 없음이 확인되면 다시 환생하여 독경ㆍ염불하는 청빈한 삶을 보낸다. 살생하지도 않고, 육식하지도 않고, 세상사에 참견하지도 않고, 인간 세상의 번뇌도 멀리하며, 사람들과 어떤 분쟁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아무런 악행도 저지르지 않고 나중에 영계로 돌아가면, 영계에서는 그가 행한 모든 행실을 검증한 후 다시 인간 세상으로 보낸다. 이렇게 역시 세 번에서 일곱 번의 윤회를 거치게 된다. 중간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그는 아무 지장 없이 열반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생사윤회는 이렇게 특별한 부분이 있다. 그들은 ‘열반에 들’ 수 있고, 영계에서 직무를 맡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과 다른 점이다. 우선, 영계에서 직무를 맡을 수 있는 이런 사람은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절대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살인이나 방화를 저지르지 않고, 간음하거나 약탈하지 않아야 한다. 남을 속여 재물을 빼앗고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하면 열반에 들 수 없다. 다시 말해, 어떤 악행에 관련되면 영계에서 내리는 벌을 피할 수 없다. 영계는 열반에 든 불교도를 적절히 배치할 것이다. 어쩌면 불교나 천지신명을 믿는 것 같은 사람을 관리하게 할 수도 있다. 그들에게 일정한 범위를 정해 주어 관리하게 한다. 또 어쩌면 이방인만 관리하게 할 수도 있고, 아주 작은 일꾼으로 배치할 수도 있다. 이는 각 영혼의 성격에 따라 분배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한 예이다.

하나님의 약속

     우리가 말한 다섯 가지 신앙에서 기독교는 좀 특별하다. 기독교는 어떤 점에서 특별하겠느냐? 그들은 참 하나님을 믿는다. 참 하나님을 믿는데 왜 여기에 분류되었느냐? 기독교를 일종의 신앙이라고 한 이상, 그것은 단순히 신앙과 관련 있는 것으로, 의식만 행하는 것이고, 일종의 종교*일 뿐이다. 이것은 진실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의 신앙과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를 5대 종교 범주에 넣은 것은 기독교가 이미 유대교, 불교, 이슬람교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종교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속한 대다수 사람은 하나님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는 더욱 믿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성경으로 신학을 가르치고, 신학으로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고생하고 좋은 일을 하라고 가르치기만 한다. 바로 이런 종교이다. 신학 이론만 중시하는 종교이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아무 관련이 없는 종교이다. 하나님을 따르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종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대하는 데에도 원칙이 있다. 이방인을 대하듯이 임의로 처리하거나 처분하지 않고, 불교도를 대하는 것과 똑같이 대한다. 기독교 신도가 생전에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엄격히 십계명, 율법과 계명에 따라 행하면서 일생을 보내면, 그들도 똑같은 윤회를 거친 후에야 그들이 말하는 소위 ‘휴거’될 수 있는 것이다. ‘휴거’되면 영계에 남아 직무를 맡고 영계의 일꾼이 된다. 마찬가지로, 만약 살아 있을 때 악행을 저지르고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면 필연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징벌이나 처벌을 받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에 든다’는 것은 극락세계에 간 것이다. 그럼 기독교에서는 뭐라고 말하느냐? ‘천국에 들어간다’, ‘휴거된다’라고 말한다. 진짜 ‘휴거’될 수 있는 사람도 세 번에서 일곱 번의 윤회를 거친 것이다. 죽은 후 잠든 것처럼 영계로 돌아가는데, 합격이면 남아서 직무를 맡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더는 세상 사람들처럼 단순하고 일반적인 윤회를 겪지 않는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결말, 그들이 추구하는 결말은 불교의 열반과 표현만 다를 뿐 다 비슷하다. 하나님은 이 몇 개 종교에 속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엄격히 종교적 규율에 따라 행한 사람에게 적절한 종착지나 갈 곳을 마련해 알맞게 처리한다. 이는 극히 합리적이지만 사람의 상상과는 다르다. 그렇지 않으냐? 기독교인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듣고 나니 너희는 어떤 느낌이 드느냐? 그들을 위해 불공평함을 호소하고 싶거나 유감스러운 느낌은 없느냐? (조금 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들도 자업자득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은 진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살아 있고 실제적이며, 하나님의 사역은 전 인류, 각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거부하는 것이냐? 왜 미친 듯이 대적하고 박해하는 것이냐?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 정도의 결말이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인 것이다. 너희는 왜 유감스럽다고 생각하느냐? 그들에게는 이런 처분도 이미 관대한 편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한 정도에 따르자면 그들을 멸해 버려야 마땅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그저 그들을 평범한 종교로 간주해 처리한다. 그럼 다른 종교는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모든 종교의 근본 취지는, 많이 고생하고,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좋은 말을 하고, 선한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을 욕하지 말고,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시비를 멀리하고, 좋은 일을 하고, 좋은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리가 이러하다. 그러니 신앙을 가진 사람, 즉 모든 종교인들이 엄격히 종교적 규율에 따라 행동하고 사는 동안 과도한 잘못이나 죄를 저지르지 않으며 세 번에서 일곱 번의 윤회를 거치면, 그런 사람들은 거의 다 영계에 남아 직무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그런 사람이 많으냐? (많지 않습니다.) 무슨 근거로 많지 않다고 하느냐? 사람이 좋은 일을 하기란 어렵고, 청규와 규율을 지키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고기를 먹지 말라는 규정이 있다. 너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하면 지킬 수 있겠느냐? 너에게 회색 도포를 입고 온종일 불당에서 독경ㆍ염불하라면 할 수 있겠느냐? 쉽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에는 십계명이 있고 계명과 율법도 있다. 그것들을 지키기 쉬우냐? 쉽지 않겠지? 욕하지 말라는 그 한 가지도 사람은 지키지 못한다. 참지 못하면 욕한다. 뱉은 욕은 주워 담지 못하니 어떻게 하겠느냐? 저녁에 죄를 자백하겠지? 가끔 욕을 하고도 마음속에 계속 증오심을 품고 있고, 더 나아가 언젠가 다시 혼내 주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요컨대, 사람이 죽은 교리대로 살면서 죄를 짓지 않고 나쁜 짓을 하지 않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종교에서 수행하여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너는 각 종교에 사람이 그렇게 많으니 영계에 남아 직무를 맡을 수 있는 사람도 너무 많지 않겠냐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신앙이 있는 사람의 생사윤회는 대충 이렇다. 특별한 점은 그들이 ‘수행하여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으로, 이것이 이방인과 다른 점이다.

2020년 2월 13일 목요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의 생사윤회


     이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의 생사윤회를 이야기해 보자. 이는 너희와 관련되는 일이니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을 몇 부류로 나눌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의 선민과 봉사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선민과 봉사자, 이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선민에 대해 말해 보자. 이 부류의 사람 수는 많지 않다. ‘하나님의 선민’은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고 인류가 생겼을 때 하나님을 따를 일부 백성을 택했는데, 그들을 약칭하여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이들을 택할 때는 특별한 범위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 범위란 이들은 하나님이 중요한 사역을 할 때마다 반드시 와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특수성이다. 그럼 의미는 무엇이냐? 하나님이 택한 백성인 만큼 그 의미는 매우 크다. 즉, 하나님은 이들을 만들고, 이들을 온전케 하고, 경영 사역이 끝날 때 이들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 의미가 크지 않으냐? 그래서 이 선민들은 하나님께 아주 중요한 존재다. 이들은 하나님이 얻으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 봉사자는 어떠하냐? 우선 운명적으로 정해졌다는 것은 제쳐 두고 봉사자의 유래를 말해 보자. ‘봉사자’는 글자 그대로 봉사하는 자다. 봉사하는 자들은 장기적이나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다. 임시로 불러 모아 고용한 자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이방인 가운데서 택한 것이다. 그들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봉사자로 정해졌을 때 그들의 전생은 어쩌면 동물일 수도 있고, 이방인일 수도 있다. 이것이 봉사자의 유래이다.

하나님의 약속

     다시 하나님의 선민을 이야기해 보자. 하나님의 선민도 죽은 후에 어떤 곳으로 가게 된다. 이곳은 이방인이나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과 완전히 다른 곳이다. 이곳은 천사와 하나님의 사자가 있는 곳이고,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곳이다. 하나님의 선민이 이곳에서 직접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이곳은 영계의 그 어떤 곳과도 다른 곳이며, 하나님의 선민이 죽은 다음 가는 곳이다. 그들도 죽으면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을 엄격히 심사한다. 무엇을 심사하겠느냐? 그들이 일생 동안 하나님을 믿으며 걸어온 길을 심사한다. 그동안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한 적이 있는지, 하나님을 욕한 적이 있는지, 심각한 죄나 악행을 저지른 적이 있는지를 심사하는 것이다. 그런 심사를 거친 후 그 사람을 내보낼지 남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내보낸다’는 것과 ‘남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내보낸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행위를 근거로 그를 하나님의 선민 대열에 계속 남겨 둘지를 결정하는 것을 뜻한다. ‘남긴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이 말세에 만들고자 하는 인류의 범위에 계속 남을 수 있는 것을 뜻한다. 남은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특별한 배치를 한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각 시기마다 이런 사람을 보내 사도가 되게 하거나 교회를 부흥시키는 사역 혹은 교회를 목양하는 사역을 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사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방인처럼 한 세대 또 한 세대 빈번하게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역의 필요와 사역 단계에 따라 윤회한다. 이런 사람은 자주 환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이 ‘환생’에 법칙이 있느냐? 몇 년에 한 번씩 환생하는 것이냐? 그런 빈도가 있느냐? 역시 없다. 그럼 무엇에 따라 환생하느냐? 하나님의 사역에 따라, 하나님의 사역 단계에 따라,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환생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해진 것은 없다. 유일하게 정해진 것은, 말세에 하나님이 마지막 단계 사역을 할 때 선민들이 모두 환생한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의 환생’은 맨 마지막 윤회를 의미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하나님이 마지막 단계 사역에서 거둘 효과를 놓고 말한 것으로, 하나님은 마지막 단계에서 이 선민들을 완전히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느냐? 이들이 마지막 단계에서 만들어지고 온전케 되면 더는 예전처럼 윤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으로 사는 과정, 윤회의 과정이 완전히 끝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남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럼 남지 못한 사람은 어디로 가겠느냐? 남지 못한 사람에게도 적합한 곳이 있다. 우선, 그의 악행, 그가 저지른 잘못과 죄악으로 인해 벌을 받기 마련이다. 벌을 받은 후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이방인들 가운데 보낸다. 적절한 상황에 따라 그를 이방인이나 신앙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배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벌을 받은 후 어쩌면 어떤 종교를 믿으며 살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이 될 수도 있다. 이방인이 되면 모든 기회가 사라진다. 하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이 되면, 예를 들어 기독교인이 되면 다시 하나님의 선민 대열로 돌아올 수도 있다. 여기에는 복잡한 관계가 있다. 어쨌든, 하나님의 선민도 하나님을 거스르는 짓을 하면 마찬가지로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예전에 언급했던 바울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그는 아직도 벌을 받고 있다. 요점을 알아들었느냐? 하나님 선민의 범위는 고정되어 있느냐? (대부분 고정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고정되어 있다. 일부는 왜 고정되어 있지 않느냐? (그들이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악행을 저지르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 자를 각 인종, 각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로 보내 버린다. 그렇게 되면 더는 희망이 없고 다시 돌아오기 힘들다. 이것이 하나님 선민의 생사윤회에 관한 것이다.

     다음은 봉사자의 생사윤회에 관한 것이다. 방금 봉사자는 어디서 왔다고 했느냐? (일부는 이방인에서, 일부는 동물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봉사자는 전생에 이방인과 동물을 넘나들며 환생했던 자들이다. 마지막 이 단계에 이르러, 하나님은 이방인 중에서 이런 사람을 일부 택했는데, 이는 특수한 무리이다. 이런 사람을 택한 것은 하나님의 사역에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봉사’라는 단어가 고상하게 들리지도 않고 모든 사람의 바람에 부합하지도 않겠지만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지 봐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이들의 존재도 특별한 의미가 있고, 이들이 하는 역할 역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봉사자의 역할은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의 선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주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고 하나님의 선민을 온전케 하는 일에 협력하는 것이다. 이들이 힘을 쓰든, 어떤 사역을 하든, 혹은 어떤 직무를 맡든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이냐? 높이 요구를 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충성스러운 봉사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봉사자도 충성을 다해야 한다. 네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든 하나님이 어떤 이유로 너를 택했든 너는 충성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이 네게 맡긴 사명에 대해, 네가 맡은 사역에 대해, 이행할 본분에 대해 충성심이 있어야 한다. 봉사자가 충성을 다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을 흡족게 한다면, 어떤 결말을 얻을 수 있겠느냐? 살아남을 수 있다. 봉사자에게 있어 살아남는 것은 복이 아니냐? 살아남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 복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지위 면에서 하나님의 선민과 좀 다르고 차이도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봉사자가 금생에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민과 같지 않으냐? 최소한 금생에 누리는 것은 같다. 이는 너희도 부인하지 않겠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공급, 축복을 누리지 못한 자가 있느냐? 누구나 풍성하게 누렸다. 봉사자의 신분은 봉사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이들도 피조물의 일원이며, 그저 이들이 맡은 역할이 봉사자일 뿐이다. 피조물의 일원으로서 봉사자는 하나님의 선민과 차이가 있느냐? 사실상 차이는 없다. 명칭과 본질, 맡은 역할에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불평등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이들을 봉사자로 정했겠느냐? 이에 대해 너희는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봉사자는 이방인 가운데서 온 자들이다. 이방인 가운데서 왔으니 이들의 본바탕은 좋지 않다. 이들은 전부 무신론자들이다. 이들의 본바탕을 말하자면, 이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로서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적대시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데 이들이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대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동물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이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말하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하나님이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다.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들에게는 앞서 말했던 생명이 없는 것이다. 생명이 없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갖췄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험이나 인식을 갖췄겠느냐?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봉사자의 유래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에게 봉사하라고 한 이상 이들에 대한 요구 기준이 있다. 결코 이들에게 멸시나 대충 대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생명도 없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이들을 우대하며 이들에 대한 요구 기준이 있다. 그 요구 기준은 방금 너희도 말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말을 잘 듣고, 제대로 봉사하고, 끝까지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네가 충성스러운 봉사자로서 마지막까지 봉사하고 하나님이 네게 맡긴 사명을 완벽히 완수한다면, 너의 금생은 가치 있게 되고, 너는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네가 좀 더 힘을 내고 노력한다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좀 더 힘을 내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좀 얘기할 수 있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좀 깨달을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좀 헤아릴 수 있게 된다면, 봉사자인 너에게 전환점이 있게 된다. 이 전환점은 무엇일까?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네 행위와 개인적인 소망과 추구에 따라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의 선민에 넣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환점이다. 이 전환점이 봉사자에게 가져다줄 최고의 이점이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의 선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더는 이방인들처럼 사람과 동물을 넘나들며 윤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니냐? 좋은 일이고 좋은 소식이다. 바꿔 말하면, 봉사자의 상황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봉사자로 정했다고 해서 그가 영원히 봉사만 하는 것은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은 개인의 행위에 따라 각기 다르게 대우하고 서로 다른 답을 줄 것이다.

     하지만 봉사자가 끝까지 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서, 봉사하는 동안 어떤 사람은 중도에 포기한 채 하나님을 저버리고 떠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나쁜 일들을 많이 저지를 수도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에 상당한 파괴를 초래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히거나 하나님을 욕하는 등등의 돌이킬 수 없는 악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악행은 어떤 결과를 의미하느냐? 이 모든 악행은 봉사자의 봉사 중단을 의미한다. 이는 네가 형편없이 봉사한 데다 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네 봉사가 크게 자격 미달이어서 더는 봉사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너의 봉사자 자격을 박탈하고, 너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너는 봉사하기 싫은 것이 아니었느냐? 늘 나쁜 짓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느냐? 늘 충성심이 없지 않았느냐? 그럼 좋다. 이 일은 해결하기 쉽다. 너의 봉사자 자격을 박탈하면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봉사자 자격이 박탈되면 하나님 편에서는 그 봉사자의 결말이 이미 선포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그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더는 봉사할 자격이 없고, 하나님은 그 사람이 더는 봉사하길 원치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해도 소용없다. 그 지경에 이르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 봉사자는 되돌아올 길이 없다. 그럼 하나님은 그런 봉사자를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단지 그 사람이 봉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겠느냐? 아니다. 아니면 단지 그 사람이 살아남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겠느냐? 아니면 그 사람이 마음을 돌릴 때까지 한쪽에 내버려 두고 기다리겠느냐?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봉사자에 대해 그렇게 큰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데에 있어서 사람의 태도가 이렇다면, 그의 태도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봉사자 자격을 박탈하고, 다시 그를 이방인 가운데로 돌려보낼 것이다. 이방인들 가운데로 보내지면 그 봉사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느냐? 이방인과 똑같이 사람과 동물을 넘나들며 윤회하고, 이방인이 영계에서 받는 벌을 받게 된다. 어떻게 처벌할지는 하나님이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사역과 아무 관계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삶의 끝일 뿐만 아니라 그의 운명의 끝이자 운명에 대한 판결이다. 그러므로 봉사자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결과 역시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봉사자가 끝까지 봉사하지 못하거나 중도에 봉사자 자격이 박탈되면, 그 봉사자는 이방인들 가운데로 보내지고, 이방인들 가운데로 보내지면 짐승처럼 취급된다. 생각이나 이성이 없는 그런 부류의 인간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이제는 알겠지?

     하나님의 선민과 봉사자의 생사윤회에 대한 처리는 이렇다. 듣고 나서 어떤 느낌이 드느냐? 내가 방금 한 이야기,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민과 봉사자에 관한 이야기를 예전에 한 적이 있느냐? 사실 예전에 한 적이 있지만 너희가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민과 봉사자를 공의롭게 대한다. 어느 모로 보나 다 공의롭다. 그렇지 않으냐? 흠잡을 만한 부분이 있느냐? “하나님은 왜 선민에게 그토록 관대하게 대하십니까? 왜 봉사자에게는 그 정도의 인내밖에 쓰시지 않습니까?”라고 물을 자가 있느냐? 봉사자에게 불공평을 호소하고 싶은 자가 있느냐? “봉사자에게 좀 더 시간을 주고, 좀 더 인내하고, 좀 더 관대하게 대할 수 없습니까?” 이 말은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으냐? (봉사자가 되는 것도 사실 저희에게 행운이기 때문입니다.) 봉사자가 된 것은 사실 행운이다. 봉사자라는 호칭이 없고 봉사자의 사역이 없었다면, 봉사자들은 어디에 있겠느냐? 이방인 가운데서 짐승과 생사를 함께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들이 하나님 앞으로 와서, 하나님 집으로 와서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리고 있는가! 이것은 엄청난 은혜다! 하나님이 네게 봉사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너는 영원히 하나님 앞으로 올 기회가 없을 것이다.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 보자. 네가 불교인 중 열반에 든 사람이 된다 해도 너는 영계에서 기껏해야 심부름꾼밖에 못 한다. 영원히 하나님을 만날 수도,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하나님이 네게 주는 사랑과 축복을 느낄 수도,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할 수도 없다. 그들이 마주하는 것은 간단한 직무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그저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순종하기만 한다. 하지만 봉사자가 이 단계 사역에서 얻는 것은 참으로 많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은혜와 축복을 느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말씀과 진리를 누릴 수 있다. 정말이지 얻은 것이 너무나도 많다! 얻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니 네가 봉사자로서 봉사하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남겨 둘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너를 남겨 둘 수 없다. 네게 그리 대단한 요구를 하지도 않았는데 무엇 하나 잘 해내지 못하고, 자신의 본직 사역을 지키지 못한다면 분명 하나님은 너를 남겨 둘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다. 하나님은 너를 총애하지 않지만 불공평하게 대하지도 않는다. 이는 하나님이 일하는 원칙으로, 어떤 사람을 대하든, 어떤 피조물을 대하든 하나님은 다 그렇게 한다.
     관련 내용 더 보기:신앙이 있는 각 부류 사람들의 생사윤회

2020년 2월 12일 수요일

하나님이 영계를 주관하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을 알다

하나님의 약속

     영계에 대해 말하자면, 영계에 있는 각종 생령들도 잘못을 저지르거나 일을 잘못 수행하면 하나님은 그에 해당하는 천상의 규율과 법령에 따라 그들을 처벌한다. 이것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수천 년 경영 사역 중에서, 잘못을 저질렀던 일부 일꾼들은 멸망되었고, 어떤 일꾼들은 지금까지도 구금되어 벌을 받고 있다. 이것은 모든 생령이 반드시 직면해야 할 사실이다. 누구든 잘못을 저지르거나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게 된다. 이 점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선민이나 봉사자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영계에서든 물질세계에서든 하나님이 일을 하는 원칙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네가 볼 수 있든 없든 하나님이 일을 하는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일관되게 자신의 원칙에 따라 만물을 대하고 처리한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방인 가운데서 비교적 착하게 사는 사람을 잘 대해 준다. 그리고 각 종교에서 좋은 일을 하고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며, 그들에게 하나님이 다스리는 만물 속에서 제 역할을 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게 한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 선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이런 원칙에 따라 그 누구도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잘 대해 주고 사랑한다. 다만 이방인부터 신앙이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선민까지, 하나님이 각 부류의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방인을 보아라.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들을 짐승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만물 속에서 그들은 어느 누구나 먹고 살 수 있고, 머물 자리가 있으며, 정상적인 생사윤회를 거치게 된다. 그리고 악을 행한 자는 징벌하고, 선을 행한 자는 하나님이 축복하고 잘 대해 준다. 그렇지 않으냐? 신앙이 있는 사람의 경우, 엄격하게 종교 규칙을 지키며 한 생 한 생 살아가면, 결국 그들의 윤회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공정한 결론을 내린다. 오늘의 너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선민이든 봉사자든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행정과 조례에 따라 이들의 행위를 규범화하고 이들의 결말을 정한다. 이 몇 부류 사람 중에서, 신앙이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모든 종교인들에게 하나님은 생존할 공간을 주지 않았느냐? 유대교는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그들의 신앙을 방해했느냐?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지? 기독교는 어떠냐? 역시 방해하지 않고, 그들이 자신들의 질서에 따라 그렇게 지키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지도 않고, 계시해 주지도 않으며, 뭔가를 밝히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렇게 믿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믿으라고 내버려 두는 것이다. 천주교인은 마리아를 믿고, 마리아를 통해 예수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그들의 신앙은 이렇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들의 신앙을 바로잡아 준 적이 있느냐?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서도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고 상관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도 일정한 생존 공간을 주었다. 이슬람교인과 불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그들에게도 일정한 범위를 그들만의 생존 공간으로 정해 주었고, 그들의 신앙도 간섭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질서가 있다. 여기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권능을 가지고 있지만 권능을 함부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만물을 일사불란하고 질서 정연하게 배치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이자 하나님의 전능이다.

2020년 2월 11일 화요일

병에 걸린 아이들을 통해 사탄의 계략을 분별하게 되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야고보서 1:12)

     창밖으로 보름달이 밤하늘에 걸려 있고 적막한 밤은 활기찬 낮과 다른 풍경을 자아내 더욱 평온해 보입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딸은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딸 얼굴에 떠오른 달콤한 미소를 보며 최근 딸이 아팠던 날들이 떠올라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다

     2018년 4월, 저는 운 좋게도 주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동안 구하고 알아본 결과 저는 기쁜 마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증거한 복음 영화와 영상은 이미 인터넷에 게시되어 전 세계 사람이 읽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하나님 말세 심판 사역이 거의 끝나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 많은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저는 매일 목마른 사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고 복음 영화를 봤으며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기쁨도 느꼈습니다.

     하루는 예배드릴 때 형제자매님이 설교 교제를 읽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세 사역에서 사람이 직면하는 시련은 더욱 많아집니다. 왜 시련이 올까요? 바로 사탄이 인류을 타락시켜 인류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류를 사탄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계의 싸움은 치열하며 싸움의 핵심은 바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 중에서 사람이 시련을 체험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려 하지만 사탄은 기어코 사람을 타락시키려 합니다. 사탄은 실패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에게 사탄의 시험이 임하도록 허락한 것은 그것을 통해 사탄의 계략을 폭로하고 사람이 사탄의 계략을 간파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된 인류는 진정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는 방식입니다.”(<설교 교제 10 ·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설교 교제를 읽은 후 경연 자매님이 교제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높여 줌과 은혜입니다! 말세 그리스도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모든 진리를 선포하셨고 하나님 집에서 시작하는 심판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심판 형벌을 받아들이면 타락한 성품이 변화되고 정결케 되며 그래야 사탄의 권세에서 철저히 벗어나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려고 하십니다. 하지만 사탄은 자신의 실패가 달갑지 않아 다양한 환경과 사람, 그리고 일로서 우리를 공격하고 시험에 빠뜨립니다. 그리고 가족을 통해 우리를 막으려고 하거나 목사나 장로를 통해 유언비어를 퍼트려 우리를 미혹하려고 합니다. 혹은 가정에 우환을 일으켜 우리에게 화를 입힙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잃어 계속 사탄에게 농락당하고 상처받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사탄의 계략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의 시험이 우리에게 닥치도록 허락하신 것은 시련을 겪게 함으로써 우리의 분량이 커지고 사탄이 사람을 타락시키고 잡아먹는 사악한 본질을 명확히 본 후 마음속에서부터 사탄을 버리고 더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르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싸움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구원과 사랑입니다!”

     자매님의 교제를 들은 후 물론 모든 것을 명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감동하였습니다. 살아생전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고 하나님께서 저를 정결케 하고 온전케 하는 사역을 얻게 되다니 정말 크나큰 은혜입니다! 앞으로 어떤 환경에 놓이더라도 저는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절대 사탄과 타협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병에 걸린 아이들을 통해 사탄의 계략을 분별하게 되다

     병에 걸린 두 딸

     어느 날 작은 딸이 갑자기 병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며 기침을 했습니다. 약을 조금 먹으면 나으리라 생각했는데 저녁이 되니 기침이 더 심해졌습니다. 저는 사탄의 시련이 제게 닥쳤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저를 향한 하나님의 시련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되지만 약해진 마음에 또 조바심이 나고 두려웠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제게 병을 내리세요. 딸은 겨우 한 살입니다. 열이 나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입니까? 기침도 심하게 하는데 이러다 폐렴에 걸리는 건 아닐까요? 남편도 곁에 없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습니다. 그때 13살짜리 큰딸에게서 국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큰딸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 아파. 너무 아파. 울고 싶어….” 두 딸이 같은 시기에 아픈 모습을 보며 제 마음은 한없이 약해졌습니다. 속으로 계속 저와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딸이 모두 아프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약도 듣지 않는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때 제가 품고 있었던 마지막 믿음이 산산조각이 났고 왜 딸들을 보호해 주지 않았냐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습니다….

     제 딸의 소식을 들은 경연 자매님이 곧바로 저를 찾아와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해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고 누군가를 보살피고 감찰하면, 사탄은 바로 그 뒤를 따라간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마음에 들어 하면 사탄은 그 뒤를 쫓아가서 살펴본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얻고자 하면, 사탄은 있는 힘을 다해 훼방 놓는다. 갖가지 사악한 방식을 동원해 시험하고 방해하며 하나님 사역을 파괴하여 오직 자신만 아는 숨겨진 목적을 이루려 한다. 사탄의 목적은 무엇일까? 사탄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도 얻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을 자기가 점령해서 통제하고 장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경배하게 하고 함께 악행을 저지르게 하려 한다. 이것이 사탄의 음흉한 속내가 아니겠느냐?』, 『너희에게 하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이면에는 사탄이 하나님과 한 내기가 있고, 모두 싸움이 있다.… 사탄이 영계에서 하나님과 싸울 때, 너는 어떻게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야 할까? 일이 닥칠 때마다 네게는 그것이 큰 시련이자 하나님이 네가 증거하길 바라는 때임을 알아야 한다. 겉으로 봤을 때 큰일이 아닌 것 같아도, 일단 그런 일이 닥치면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설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 사랑하기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네가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자요, 진리도 생명도 없는 쭉정이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일이 닥칠 때마다 그때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야 할 때이다. 지금 네게 큰일이 닥치지 않아 별로 크게 증거한 것은 없지만, 일상의 사소한 부분도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자매님이 교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사탄이 하나님의 적이고 하나님께서 사역을 통해 누군가를 구원하려고 하면 사탄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 사람을 막고 괴롭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사탄의 사악한 본질로 결정된 것입니다. 오늘 아이들이 아프게 된 일도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아이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치명적인 약점을 잡아 아이를 아프게 함으로써 우리를 방해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어 결국 하나님을 멀리하고 배신하게 만들려는 속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이 얼마나 비겁하고 사악한지 알 수 있습니다! 자매님, 우리가 직면한 이 상황은 영계의 싸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탄의 시험인 것이죠. 우리는 사탄의 계략을 꿰뚫어 보고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야 합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시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죠. 진실한 믿음인지 거짓된 믿음인지, 속이 꽉 찬 알곡인지 텅 빈 쭉정이 인지 모두 시험을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힘든 상황이 오지 않았을 때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과 믿음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련 앞에서 우리의 실제 분량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의 모자란 부분과 부족한 부분을 보면서 분량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게 허락한 것입니다. 이런 역사는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자매님, 아이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아이의 병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아이를 하나님께 맡기고 아이의 병이 어떻게 되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배치에 따라야 사탄에게 치욕을 안겨 주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자매님의 교제 덕분에 이번 일이 사탄이 저를 괴롭히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사탄은 아이가 아픈 것을 이용해 제가 하나님을 의심하고 배신하게 할 속셈이었어요. 사탄은 정말 사악하네요! 오늘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않았다면 저 역시 하나님을 원망하며 정말 하나님을 배신해 사탄에게 잡아먹히는 대상이 되었을 겁니다. 저를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경연 자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뻐하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아이가 육적으로 고통을 받고 자매님도 마음고생을 했지만 이런 상황을 통해 사탄의 사악하고 비겁한 본질을 명확히 볼 수 있었어요. 이 역시 큰 수확입니다! 자매님, 걱정 마세요. 아이의 목숨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증거한다면 사탄은 치욕을 당하고 사라질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과 자매님의 교제를 통해 저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자매님의 교제를 통해 제가 사탄의 비겁함과 사악함을 알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가 깨달은 진리가 너무 적어 사탄의 계략에 걸리고 당신을 향해 원망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이제 당신께 회개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아이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두 딸을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부디 제게 힘과 믿음을 주시어 제가 당신을 증거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아멘!’ 기도드린 후 제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그날 저녁, 작은딸이 또 고열에 시달렸습니다. 처음 고열에 시달리는 딸을 보았을 땐 당황했지만 하나님께 기도드려 평정심을 되찾고 딸에게 해열제를 먹였더니 잠시 후 열이 가라앉았습니다. 이튿날, 큰딸의 열도 내렸습니다. 게다가 병도 약간 호전되었습니다. 두 딸이 모두 호전되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을 향한 제 믿음이 커졌습니다. 

2020년 2월 10일 월요일

어린양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주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를 찾다


     지금의 교계는 수많은 교파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뜨거워 보이지만 은혜되는 설교가 없으며 신자들의 영혼은 갈급하기만 합니다. 또 어떤 교회는 사람이 많아 보이지만 시기와 질투, 분쟁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교회들 속에서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필자의 체험에 따라 그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지난날의 회억(回憶)
     10여 년 전,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어서 공허하고 외로웠습니다. 나중에 친구를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교회를 나가는 게 참 좋았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매우 은혜가 됐고, 주일날이면 교회 안은 사람으로 가득 찼습니다. 게다가 하나같이 열정적으로 신앙하는 신도들의 모습을 보면 내심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예배가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다들 모여 앉아 서로의 체험을 나누며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간증했고 기쁨을 함께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면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저에게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집이자 가장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저도 조금씩 신앙 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전도 활동에 참여하며 교회에서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의문스럽고 답답한 마음, 교회가 어쩌다 세상처럼 되었는가?
     그러나 언젠가부터 교회의 열기가 점점 식어갔습니다. 젊은 교역자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교회에서도 거리낌 없이 애정 표현을 하며 성도의 품위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평신도들도 당연하다는 듯 교회를 데이트 장소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이 정말 싫었습니다. 어느 날 주일 예배에서 A 장로가 교회의 그런 모습을 놓고 지적했습니다. 세상의 시류를 좇는 이방인들처럼 살지 말고, 세상의 더러운 것으로 교회를 어지럽히지 말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는 다른 두 장로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A 장로에게 그렇게 설교하면 젊은이들이 싫어한다며, 젊은 사람들을 생각해 주어야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도 두 장로는 A 장로를 밀어내기 시작했고 심지어 교인들 앞에서도 대놓고 무시했습니다. 결국, 정의감이 있는 A 장로는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며 저는 ‘A장로님의 말씀이 맞지 않은가?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니 당연히 바른 자세로 임해야지! 여기는 세상도 아니고 데이트 장소도 아니잖아! 형제자매들이 세상의 악한 흐름을 쫓아 가는 모습은 사람도 못 봐줄 정도인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실까? A 장로님의 권고는 주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잖아! 근데, 두 장로는 A 장로를 지지하기는커녕 배척을 하다니, 이건 죄를 방임시키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 장로가 떠난 후, 다른 장로가 강단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설교 내용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오래 참으며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국가의 번영을 위해 기도하라고만 가르쳤고, 아무런 은혜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다른 목사님들을 초청해 예배를 하기도 했지만 전부 먹고 마시고 노는 세상의 일, 세상의 시류, 부자가 되는 비결 등의 이야기만 할 뿐, 새로운 것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장로들은 교회에서 학력이 높은 박사나 명망이 있는 사람들을 강단에 세웠고, 그들은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접근을 했습니다. 결국, 예배는 국어 수업을 듣는 느낌만 들었고 전혀 은혜가 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갈수록 불법이 성해졌고, 황폐함으로 전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고, 예배에 온 사람들도 대부분은 졸거나 휴대폰만 들여다 보았으며, 예배가 끝나면 돌아가기 바빴습니다. 장로들은 교회의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까 봐 두려워 홍콩에서 설교 mp3를 구해 무료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게다가 주일날에 나오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장로 부부가 과일 바구니를 들고 심방을 다녔고, 설날이나 명절이면, 케익, 빵 등의 선물을 들고 찾아다니며 감언이설로 달래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물도 받았고, 장로 부부의 ‘특별한 배려’를 받으니 교회에 오면 헌금을 두 배씩 했습니다. 저는 은혜가 되는 교회를 찾아볼까 생각도 했지만 괜스레 장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해서 망설이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확실히 변질되었고, 목자와 성도들 사이는 영적으로 붙들어 주는 관계가 아니라 육적 이익을 유지하는 관계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떠나기도, 그냥 눌러 앉기도 그렇고, 마냥 갇혀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이런 상태면 과연 주님께서 이 교회에 거할지, 이런 믿음을 과연 주님께서 인정하실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어린양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주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를 찾다
     뜻밖의 기회, 교회가 황폐한 원인을 알다
     2018년 4월의 어느 날 오후, 버스 정류장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사 온 엠마(Emma) 자매를 알게 됐습니다. 우리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이야기가 잘 통했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도 자주 연락을 하며 지냈습니다.

     어느 날, 엠마가 이사를 했습니다. 저는 인사도 하고 새 집을 구경도 할 겸 찾아 갔습니다. 거기서 그녀의 이웃인 천(陳) 형제님을 알게 됐습니다. 천 형제는 설교자였고 붙임성도 좋았습니다. 우리는 자연히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그리고 불안한 국제 정세를 이야기할 때, 천 형제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면, 큰 재난이 있을 거라고 예언하셨죠. 지금 보면 전쟁, 전염병, 기근, 지진, 산사태, 화산 폭발, 홍수 등, 각종 천재와 인재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 예언이 거의 이루어졌고 주님이 오실 때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맞이할 이 중요한 때에 우리는 슬기로운 처녀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6절에 보면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라고 소리친다고 했습니다. 그건 주께서 오시면, 소식을 알리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지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 주님의 제자들이나 사도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증언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인 지금, 주님이 오셨다는 메시지를 들으면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찾고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형제님의 교제는 매우 새롭고 실제적이었으며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전에는 지금이 주께서 오실 시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주의 음성을 아는 슬기로운 처녀가 돼야 한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정말 큰 것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성경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천 형제님의 깨달음과 견해는 목사님보다 더 뛰어났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다니는 교회의 상태와 마음의 고민, 그리고 의문을 털어놓았습니다. “형제님, 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한 번 여쭤 볼게요. 지금 우리 교회의 분위기를 보면 그렇게 좋지 않아요. 성도들은 세상의 시류를 따라가고, 장로들은 서로 패거리를 짓고 질투하며 분쟁을 합니다. 은혜가 되는 설교를 못하니 계속 작은 선물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지요. 이제는 죄를 지어도 성령의 징계가 보이지 않아요. 왠지 교회가 변질된 것 같아요. 그 이유가 뭘까요?”

     천 형제님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자매님, 교회가 변질됐다는 걸 아시네요. 그건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이 세상처럼 변했고 죄를 지어도 성령의 징계가 없다는 건 구약 말기에 성전이 황폐해진 시기와 다름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를 알려면, 성전이 황폐해진 원인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2~13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구약 시기의 성전은 원래 여호와의 영광으로 충만했고, 사람들에게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모두 공손한 자세로 임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어기려는 사람이 없었죠. 게다가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어기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그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구약 성경에 웃시야 왕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제멋대로 분향하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문둥병이 걸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크게 경외했고, 성전에서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전 밖에서 새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성전은 우양과 비둘기를 사고 팔고, 돈을 바꾸는 도적의 소굴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징벌이나 징계가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실 때는 불법을 저지르는 일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떠나시니 성전은 곧바로 황폐해지고 도적의 소굴로 변했으며 불법이 성했습니다. 이처럼 뚜렷하게 대비되는 현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 불법이 성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떠나셨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건축하고 사람이 많고, 열심히 춤추고 노래하며 뜨거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떠나셨다면, 그곳은 사람이 만든 단체일 뿐이고,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거짓 교회가 된 것입니다.”

     형제의 교제를 들으니 놀랍기도 했고 부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악을 미워하는 분이시니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교회라면 분명 성령의 징계가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느낄 수 없었고, 장로들은 영적인 관계가 아닌 육적인 관계로 교회를 운영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우리 교회는 확실히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휴, 교회라고 해도 주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교회라고 할 수 없구나. 그리고 우리 교회와 같은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닌데, 설마 그 많은 교회가 다 주님의 뜻에 합당치 못한 거짓 교회란 말인가?’ 저는 놀랍기도 하고 의아해서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참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는 법을 찾고 구하다
     그래서 형제님께 물어보았습니다. “형제님,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가 이런 상태입니다. 목사들도 그저 잘 먹고 노는 이야기를 하거나 헌금에 대해서만 많이 강요를 합니다. 그럼 그런 교회는 다 주의 뜻에 합당치 못한 것인가요? 참교회와 거짓 교회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요? 아직 이해가 좀 안 되는데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형제님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네, 주님의 뜻에 합당한 참교회가 맞는지를 구별하려면 두 가지를 근거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있는지, 사람들의 생명이 계속 자라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아시겠지만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다면, 그곳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이죠. 따라서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면 성령의 깨우침과 감동이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깨닫게 되고, 영적으로 충분히 공급을 받게 되며 생명도 자라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은 점점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교회라면 인원수에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세 명밖에 없는 곳일지라도 성령이 함께하시면 진정한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예배 시간에 성령의 인도와 깨우침이 없고 항상 메말라 있어 신도들이 영적 양식을 먹지 못하고 생명이 자라지 못하며, 믿음이 계속 식어 간다면 형식적인 예배 의식을 행할지라도 교회가 아닙니다. 게다가 대놓고 세상의 시류를 좇아 가는데도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그 교회는 이미 율법시대 말기의 성전과 똑같이 성령의 역사가 없는 거짓 교회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교회’는 아무리 사람이 많을지라도 그냥 모임 장소일 뿐, 교회라 칭할 수 없습니다. ”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참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는 근거는 성령의 역사가 있는지, 우리의 생명이 자라나고 있는지 봐야 한다.’, 맞는 말씀이네요. 성령의 역사가 있다면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인도와 깨우침이 있을 것이니 형제자매들은 분명히 갈수록 좋아지겠죠. 근데,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니 예배도 별 의미가 없겠고, 진정한 영적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모두가 다운되고 소심해지겠네요. 그럼, 교회를 떠나는 일도 많아질 것이고 교회는 구약 말기의 성전처럼 불법이 성해지고 도적의 소굴이 될 수밖에 없겠네요. 지금 우리 교회를 보면 그래요. 설교를 한다지만 반복된 구호나 외치고, 툭하면 세상처럼 먹고 마시고 놀기 바쁘고,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접근할 뿐, 새로운 깨우침이 없어요. 그래서 설교를 열심히 들어도 밋밋하기만 하고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저도 예수님 믿은 지 오래 됐지만 생명은 별로 자라지 못했어요. 지금은 새 신자 때보다 더 못해진 느낌이에요. 근데,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도 믿음과 사랑과 열의가 다 식어 버렸어요. 이게 성령의 역사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겠어요? 이대로라면 우리 교회도 거짓 교회잖아요! 휴, 지금까지 바보처럼 믿었네요. 계속 이런 신앙을 하다간 주님을 잃어 버려도 모르겠네요.”

     그때 천 형제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 뜻에 합당한 참교회가 맞는지 구분하는 두 번째 원칙도 있습니다. 아주 분명한 말씀이 있으니 한 번 보시죠”

     말을 마친 형제님은 태블릿 PC를 열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진리를 행하는 사람들은 버림받아 자신의 능력을 다하지 못하고, 반대로 교회를 교란하며 죽음의 기운을 퍼뜨리는 자들은 교회에서 마구 날뛴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들을 따른다. 이런 교회는 그야말로 사탄이 권세 잡고 마귀가 왕 노릇 하는 곳이다. 만약 그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마왕들을 내치지 못한다면, 그들도 언젠가는 망가지고 말 것이다. 이런 교회에 대해서는 향후 마땅히 조치를 취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조차 찾고 구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제거되어야 한다.

2020년 2월 9일 일요일

알렉산더 대왕의 유언에서 얻어야 할 인생 깨달음


     우연한 기회에 휴대폰에서 역사 이야기를 한 편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얻은 깨달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장군 중 하나인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알렉산더 장군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던 길에 병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죽음 앞에서 그는 병사들에게 세 가지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 세 가지 유언은 자신의 관은 반드시 자신의 의사가 옮기도록 할 것, 관을 무덤으로 옮기는 길에 금은보화를 잔뜩 뿌려 놓을 것, 두 손을 관 밖에 내놓을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알렉산더가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세상 사람에게 세 가지 교훈을 남기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우선 의사가 관을 옮기게 함으로써 그 어떤 의술도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없고 의사가 생사를 결정할 수 없음을 보여 주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살아생전에 돈과 부를 좇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추구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저 시간 낭비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수래공수거, 즉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알렉산더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알렉산더는 아쉬움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사람에게 평생 돈을 좇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고 아무리 많은 재물도 사람의 목숨을 되살릴 수는 없으며 더욱이 생명을 연장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겨 주고 떠났습니다. 안타깝게도 알렉산더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고 나서야 이 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저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태복음 16:26)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목숨입니다. 목숨이 사라진다면 아무리 많은 돈도 한낱 휴짓조각에 불과하며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알렉산더가 자신의 체험을 통해 후손에게 자신과 같은 우를 범하지 말라고 교훈을 주었지만 슬프게도 후손들은 그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한 채 알렉산더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매일 정신없이 바쁘게 살며 온갖 수단을 동원해 더 많은 부를 누려 양질의 삶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알렉산더 대왕의 유언에서 얻어야 할 인생 깨달음

     철이 든 후 제 기억 속의 아버지는 매일 돈 버느라 바쁘신 뒷모습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쓰러졌고 그렇게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별세에 가족들은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한순간에 가버리다니. 아무리 돈이 많으면 뭘 한담? 사람이 죽었는데 그 많은 돈이 다 무슨 소용이야? 결국 빈손으로 돌아갈 것을….”이라며 개탄했습니다. 아버지의 별세에 저는 마음 아파하면서도 안타까움이 남았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아등바등하며 돈을 버셨고 아끼고 아끼며 평생을 바쁘게 보냈습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로 많은 아쉬움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체 사람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정말 개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러다 운 좋게도 저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저는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돈과 명성과 부를 좇는 데에 인생을 쓴다. 그리고 그것을 목숨을 건지는 지푸라기로 삼고 유일한 의탁으로 삼는다. 그것만 있으면 영원히 살 수 있고 죽음도 오지 않을 것처럼 꽉 움켜쥔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멀리 있고 죽음 앞에서 얼마나 힘이 없는지,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지,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스스로가 얼마나 외롭고 무력한지를 깨닫게 된다. 또 사람들은 돈이나 명성과 부로 목숨을 교환할 수 없다는 것, 아무리 부자여도,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 해도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똑같이 가난하고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돈으로 목숨을 살 수 없고, 명성이나 부가 죽음을 면케 하지 못하며, 둘 중 어느 것도 단 1분 1초를 더 살게 하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살면서 익히는 다양한 생존의 기술로 물질적 편안함은 충분히 얻을 수 있지만, 그것들이 마음의 진정한 평안과 위안을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자꾸만 방향과 통제력을 잃게 하고, 삶의 의미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치게 하며, 올바른 방법으로 죽음을 대면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이렇게 해서 삶은 망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며 저는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우리는 정말 돈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세상에 믿을 것은 돈뿐이며 아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우린 매일 정신없이 살며 돈이나 명예와 관련 없는 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도 가끔은 삶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사는 것일까요?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평생 돈만 좇으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런 질문을 던지기만 한 채 해법을 찾기도 전에 사악한 사회의 흐름에 휩쓸려 계속 바쁘게 뛰어다닙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조금씩 갉아 먹히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비극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돈으로 목숨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돈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흐름에 휩쓸려 악착같이 돈을 벌고 끝내 몸이 버티지 못해 쓰러지고 나서야 후회하고 두려워합니다.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가 돼서야 깨달으면 너무 늦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우리를 돈의 족쇄에서 벗어나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내적 상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기존의 삶의 방식과 인생 목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생활 방식과 인생관, 추구, 소망과 꿈을 정리하고 분석한 다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요구에 대조해 자신의 생존 방식과 인생관 등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 있는지, 하나님의 요구에 맞는 것이 있는지, 올바른 인생의 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진리를 점점 더 깨닫는 삶을 살고 인성 있게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게 하는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인류가 추구하는 다양한 삶의 목표와 방식을 반복적으로 살피고 자세히 분석해 보면, 창조주가 인류를 창조할 당시의 뜻에 들어맞는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창조주의 주재와 보살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고, 사람을 타락시키고 지옥으로 이끄는 함정임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기존의 인생관을 버리고 여러 함정을 멀리하며, 하나님께 삶을 맡겨 배치하고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에 순종하기만을 구하며, 자신의 선택이 없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길을 가리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돈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사는 것은 사탄이 우리에게 ‘돈이 최고’, ‘돈이 만능은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등 황당무계한 생존 법칙을 주입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릇된 논리가 우리를 미혹하고 타락시켜 우리는 돈을 삶에서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우린 남들과 다투고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며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영혼의 깊은 곳도 점점 공허해지고 고통스러웠으며 끝내 돈 때문에 몸까지 상했습니다. 심한 경우 과로사로 세상을 떠나 자신의 목숨을 짓밟기도 했습니다. 사실 사람이 평생 얼마의 부를 쌓을 수 있고 얼마의 재산을 가질 수 있는지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이런 생존 법칙으로 우리가 돈에 매달리게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재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와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마음속으로 과거 황당한 인생관을 모조리 벗어 던지고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해야만 돈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고 공허함과 고통스러운 삶에서 헤어나와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은 많은 부와 함께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했습니다. 사탄이 욥을 꼬드기고 시험할 때 욥의 모든 재산은 강도에게 약탈당했고 자식들도 재난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욥도 온몸에 악창이 나서 고통을 참기 힘들어했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을뿐더러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기 1:21) 욥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욥은 재물이 자신의 힘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정해 놓으셨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뺏어 가시건 거둬 가시건 욥은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했고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며 사탄에게 치욕감을 선사함과 동시에 하나님께는 영광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욥을 칭찬하시어 재산과 수명을 배로 늘려 주셨고 욥에게 마을에서 가장 예쁜 자녀도 주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바람 속에서 욥에게 나타나시어 친히 말씀하셨고 하나님을 향한 욥의 인식은 더욱더 깊어졌습니다. 욥은 평생 아쉬움 없이 살았고 죽을 때에도 삶에 만족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욥의 간증을 통해 우리는 평생 돈을 좇아도 아무 의미 없고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삶을 추구하며 평생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야만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 속에서 살 수 있으며 진정한 즐거움과 해방감, 자유를 느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의미 있는 삶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